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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pth of the BLUE

초감각적 상상 풍경도

 

박영택( 미술평론, 경기대교수)

 

캔버스에 한지를 부착해 만든 화면위로 규사, 모래, 석회 등이 얹혀지고 그 위를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가 긁고 있다. 표면에 상처를 내거나흔적을 새기는 형국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몸짓이자 이미지의 기원을 상기시키는 한편 무엇보다도 절실한 기억, 각인, 저장, 전달이라는 인간이 지닌 예술적 욕망의 세계를 두툼하게 일러주고 촉각적으로 전달해준다. 암시적인 부호나 알 수 없는 상형문자나 기호 같은 흔적이 음각으로 밀려들어간 위로 습성의 안료들이 안개처럼 퍼진다. 거칠고 비균질적인 화면을 타고 번지는 안료들은 대개 깊은 청색이나 좀 더 어두운 색, 마치 산화된 철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붉은 색, 불투명한 녹색 등으로 바다 속이나 눅눅한 지하 동굴이 벽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미 그 바탕 면 자체가 농도 짙은 추상화면이 되었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2차원의 납작한 평면에서 돌출되는 ‘다층적 상상구조의 환영공간’으로 들어오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끌어들여 교감하게 하는,‘순수하고 절대적인 상상의 힘으로 가득한 평면’이 다름아닌 회화의 표면이다. 다분히 무목적적인 그리기 그러나 다소 숭고한 분위기나 비의적인 정신성으로 혼곤한표면 위로 동양화 모필로 그려진 선들이 지렁이처럼, 뱀처럼 기어 다니고 실타래처럼 엉키고 기하학의 직선이나 도형의 꼴을 암시하면서부유한다. 끼적거린 선들, 잔주름 같은 선들이 해초처럼, 풀처럼 혹은 바람처럼, 또는 파문처럼 흔들리고 떨어댄다. 그 선들은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특정 대상을 묘사하거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조금은 벗어나있다. 몇 겹의 층을 지닌 화면위로 느닷없이, 우연히 출몰하는 그 선들은 무심코 출현하는 작가의 사고와 생각의 속도와 흔적 또한 암시한다. 거대하고 깊은 사유의 바다 속에 별안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찰나의 상념들을 닮은 이미지와도 같다는 생각이다. 모호하고 낯선 생각의 생생한 출몰이나 떨림 말이다. 그 선들은 명확하게 인지되는 문자와는 달리 미묘한 감정이나 느낌, 붙잡을 수 없는 사고의 속도를 애써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절박한 몸짓의 수기에도 해당한다. 그것은 “의미 이전의 뇌의 웅얼거림 같은 기호풍경을 그려가는 일”이다. 그 기호들은자신의 뇌 속의 시간과 공간을 뭉쳐 놓은, 깊고 짙푸른 상상의 바다를 유목적으로 떠돌고 무한대로 진화하면서 알 수 없는 아주 사소하고거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직관에 의해 풀려나온, 충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각인된 그 형태들이 보는 이의 내부를 떠다니며 자유롭게 읽혀지고자 하는 것이다. 

 

선 스스로가 독립된 생명체로써 화면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번식한다. 그 생명체 혹은 에너지나 기운은 정형화 된 형태를 갖지 않고 가변적이며 생성적이다. 흐르는 에너지나 생명 법칙을 암시한다. 심연을 헤엄치는 수중 생물 같은 이 존재는 마치 화면 위에서 자생하는 생명체처럼 자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는 자신의 생명체 안에서 또 다른 생명체를 화면위에 주술처럼 부려놓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자연을 추적하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 혹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기원과 생성의 법칙을 묻는 형태”이며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으로서의 그리기라고 말한다. 자연과 생명이 불가해하듯 작가의 그림 역시 알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부드럽게 퍼지는 바탕 위로 느리게 선회하고 미끄러지는 이상한 흔적, 기호들의 멈춤이다. 매혹적인 색채의 피부위로 풀려나가는 손의 떨림이다. 손으로 그린다는 것은 몸짓언어의 기술인 셈이다. 그것은 현실세계를 규정하는 모든 코드를 벗어난 생생한 감정과 사유의 언어, 기호에 해당한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손으로 그린 그림들이 결코 파악되지 않을 사유의 무한영역을 드러내는 순전한 시지각의 체험과정이자 명확한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모호하고 날 선 사고의 생생한 기록물이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작가의 그림은 고유한 한 생명체가 지닌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서 발아하는 온갖 것들의 회화화다. 나로서는 아름다운 색채와 기묘한 형태들이 자아내는 부드러운 율동과 느릿한 속도감, 촉각적인 표면의 질감 그리고 그 위를 부드럽게 쓸고 다니는 모필의 전율이 좋다. 그 필의 맛이 매력적이다. 그것들이 모여 수수께끼와 영감, 신비로움을 안긴다. 한편 판독되거나 알 수 없는 것들은 그것 스스로 기이한 힘을 지닌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작가는 도저히 재현될 수없는 것들,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들, 의미 이후의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려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어떤 흔적과 징후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역시 하나의 회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미술은 유한한 윤곽 안에 아름다움을 지닌 형태를 재현하려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유한한 형상으로 가둬 둘 수 없는 무한한 것을 그리고자 했다. 이정은의 그림 역시 재현될 수 없는 것들, 유한한 형상에 갇힐 수 없는 것, 순수한 조형성의 프레임 안에서 충족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림은 하나로 통일된 모종의 분위기, 전체적 효과를 발산한다. 의미를 붙이고 의미를 캐내는 작업에서벗어나 있는 이정은의 그림은 이름 붙일 수 없고 호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아주 모호한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사실 자연과 생명, 삶이란 모호하다. 저마다의 내면과 사고, 감정 역시 모호하고 불안하고 결코 알 수 없는 불가해한것, 온전히 재현될 수 없는 것처럼 회화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림 역시 불가피하게 하나의 기미이거나 단서와도같은 것이다. 간절하기만 한 몸짓이고 안타까운 제스처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분명한 떨림으로 다가와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상상하게 하면서 퍼져나간다. 보는 이를 마냥 일깨운다. 일깨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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